택시 기사들과 얽힌 모험은 흥미롭기로 뉴욕을 따라올 곳이 없는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뉴욕에는 온갖 출신과 언어, 피부 색깔의 택시 기사가 있다. 표찰에 적혀 있는 이름을 보고, 그 기사가 터키 사람인지, 말레이시아 사람인지, 그리스 사람인지, 러시아계 유대인인지 알아보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의' 라디오와 연결되어 있는데, 방송은 그들의 언어로 말하고 그들의 노래를 방송한다. 때로는 빌리지에서 센트럴파크까지 가는 것이 마치 카트만두로 여행하는 듯하다.
두 번째로 뉴욕에서는 평생 택시 운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 직업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생, 실직한 은행원, 갓 이민 온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세 번째로 택시 기사 자리는 집단으로 계승된다. 어느 시기에는 대다수가 그리스 사람이고, 다음에는 모두 파키스탄 사람, 그 다음에는 모두 푸에르토 리코 사람 등이다. 따라서 이민의 흐름을 관찰할 수 있고, 또 여러 인종의 성공에 대해 관찰할 수도 있다. 어느 집단이 택시에서 사라지면, 그것은 그들이 성공하고 있으며, 소문이 돌아 모두 담배 가게나 야채 가게에서 일하고 있으며, 도시의 다른 구역으로 옮겨 가고 있으며, 그들의 사회적 단계가 상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심리적 차이를 제외하면(히스테릭한 사람, 아주 친절한 사람, 정치적 참여자, 무엇인가에 반대하는 사람 등이 있다), 택시는 최고의 사회학 관측소다.
지난 주 나는 어느 유색인이 모는 택시에 타게 되었는데,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운 이 기사는 자신이 파키스탄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고(뉴욕에서는 언제나 누군가 다른 곳에서 온다), 나는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계속 질문을 해댔다. 한국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곧이어 내가 이해한 바로는,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한국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어떤 말을 쓰는지도 몰랐다(대개 택시 기사에게 한국에서는 한국어를 쓴다고 말하면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이제 온 세상이 영어로 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한반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가운데에 산들이 있고, 주위에는 해변이 많이 있고, 아름다운 섬이 많이 있다고. 그는 우리 인구가 몇 명이냐고 물었고, 그렇게 적은 숫자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우리가 모두 황인인지 아니면 혼혈 인종인지 물었고, 나는 원래 완전히 황인 국가였으나 지금은 외국인이 약간 있지만 어쨌든 미국보다는 적다고 설명했다. 당연히 그는 파키스탄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알고 싶어했고, 아마 약간은 있지만 필리핀이나 중국 사람들보다는 적다는 말을 듣고는 실망하는 표정이었고, 무엇 때문에 자기 나라 사람들이 그 나라를 피하는지 자문하는 모습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말실수를 했다. 나는 인도인도 조금 있다고 말했고, 그는 증오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토록 상이한 두 국민을 한데 묶어 놓았고, 또 그토록 불쾌하게 열등한 사람들을 거론하는 실수를 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우리의 적이 누구냐고 물었다. 내가 미안한데, 뭐라고요? 하고 묻자, 그는 인내심 있게 우리가 영토 회복, 인종적 증오, 끊임없는 국경 침범 등으로 인해 현재 어떤 국민과 전쟁 중인지 알고 싶다고 설명했다. 여전히 인내심 있게 우리의 역사적 적들, 즉 그들이 우리를 죽이고 우리가 그들을 죽이는 그런 적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설명했다. 나는 반복해서 말했다. 우리는 적이 없다고, 마지막 전쟁은 벌써 55년 전에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그 때는 누가 적이고 누가 우리 편이었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전쟁을 했다고. 그는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다. 분명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적이 없는 국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일은 거기에서 끝났다. 나는 우리의 무감각한 평화주의에 대한 보상의 표시로 팁을 2달러 주고 내렸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이 에스프리 드 레스칼리에esprit de l'escalier라고 부르는 현상, 즉 누군가와 이야기한 다음 계단을 내려와서야 갑자기 그에게 말했어야 하지만 그 순간에는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던 문장이 떠오르는 현상이 나에게 일어났다.
나는 사실 한국인들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다. 한국인들은 외부의 적이든 뭐든 누가 적인지 설정하는 데 전혀 합의를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내부의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자기들끼리 전쟁을 한다. 예전에는 도시 대 도시, 주류 학파와 비주류 학파, 다음에는 계급 대 계급, 정당 대 정당, 정당의 한 파벌 대 같은 정당의 다른 파벌, 그 다음에는 지방 대 지방, 마지막으로 정부 대 경제권력, 신문 대 신문, 개신교 대 다른 종교, 보수 대 진보의 전쟁이다.
그랬다면 혹시 그 택시 기사는 이해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적이 없는 나라에 속해 있다는 보기 흉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1996)와 김운찬이 알면 차분하게 날뛸 법한 궁시렁의 패러디 도전 제 2탄.


미네르바 성냥갑 La Bustina di Minerva
움베르토 에코 지음 /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