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지누'에 해당하는 궁시렁 58

  1. 2008.08.28 피터의 법칙 4
  2. 2008.08.27 요청하신 책은 대출중입니다. 14
  3. 2008.08.21 일기장 10
  4. 2008.08.20 넝마 종이의 페스트
  5. 2008.08.11 괴벨스의 입 4
  6. 2008.07.23 보이지 않는 손의 신화를 까발리다 2
  7. 2008.07.17 단짝 친구
  8. 2008.07.12 도마뱀과 끔찍한 민주주의 2
  9. 2008.07.05 독단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해로운 독
  10. 2008.06.30 가난한 어부의 우화

피터의 법칙

And Everything 2008. 8. 28. 15:58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데 그렇게 집착하는 것은, 그 누구도 이제는 자기 직업을 수행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이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자기 직업을 잘 수행할 때 놀라기도 한다. 군복을 입은 깡패들이 가스통에 불을 붙이며 시민들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경찰관이 깡패에게 맞은 시민이 아니라 군복을 입은 사람을 붙잡을 때 경찰의 전문성을 칭찬하는 식이다.
그런데 실제로 전 세계에는 자기가 직업으로 하는 일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것은 널리 알려진 피터의 법칙 때문이다. 피터의 법칙은 캐나다의 심리학자 로렌스 피터의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대기업 또는 특히 공공기업에서 피고용인이 무능력의 수준까지 승진하게 되는 경향을 말한다. 즉 특정 분야의 일을 잘 해내면 그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하게 되고 다른 분야까지 담당하게 됨으로써, 직위가 높아질수록 오히려 능률과 효율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지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무능력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츠키야마는 훌륭한 포크레인 운전수인데 인사 책임자로 승진하게 되면, 땅을 파는데는 아주 유능한 츠키야마가 조직 관리에는 무능하다는 것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피터의 법칙이 말하듯이, 회사 조직에서는 규정상 각자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종 한국의 대통령은 선거 운동 조직에서 유능하고 헌신적이며 탁월한 능력을 보인 인물을 공공기업의 이사나 금융회사의 회장으로 임명하기도 하며, 따라서 많은 공공기업 이사들이 통상적인 업무를 잘 모르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그릇된 전문성 의식이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은 부정부패의 부수적 효과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즉 누군가에게 혜택을 주거나 또는 제거하기 위해 그가 할 줄 모르는 일을 하도록(돈도 더 많이 주면서) 자리를 옮기게 했기 때문이다. 어느 개인파산 신청자에게 증권 시장 관리를 맡겼고, 청와대의 어느 고위 경제 관리가 해임되었을 때 그에게 OECD 대사를 맡기기도 했다.
국제적 버전의 피터의 법칙은 하위 수준에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 자에게 더 높은 수준에서 자기 능력 밖의 일을 수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가리킨다. 반면 한국판 피터의 법칙은 하위 수준에서도 무능력하다고 증명된 자에게 더 높은 수준에서 무능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허락한 것을 가리킨다.



움베르토 에코(1993)와 김운찬이 알면 차분하게 날뛸 법한 궁시렁의 패러디 도전.


미네르바 성냥갑 La Bustina di Minerva
움베르토 에코 지음 /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2004




우울한 딱따구리님의 추천 도서 Plan B 3.0과 매직보이님의 추천 도서 노트의 비밀을 읽어보려고 도서관에 가려다 저번에 중도에 갔다가 허탕친 게 기억나서 책이 있나 미리 조회를 해보니, 두 권 다 없다!

그런데 지정도서실은 어디지...?


공교롭게도 반납예정일이 똑같이 9월 1일인 걸 보니 한 사람이 빌려간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 ㅎㅎㅎ
누가 언제 나꿔채갈지 모르니 두 권 다 예약을 해 두었다.


- 지금 공부는 안 하고 한가하게 책이나 읽고 있을 시간이 있어?
- ...;;;

일기장

Mostly Harmless 2008. 8. 21. 18:09
이제는 어린이가 더 이상 하나의 마법적 대상물(거기에 수많은 기억과 감동이 서린)에 거의 한 생애를 바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냉정해 보인다. 어떻게 일기장 없이, 또는 기념물도 없이 지상에서 살아갈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 안젤로 오르소 이야기, 1992



수많은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국민학교(아... 내가 국민학교의 마지막 세대인가?) 다닐 때 일기 쓰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방학 일기야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초등학교(낯간지럽군 -_-ㅋ) 일기장은 다 쓰기가 무섭게 (아마도 통쾌한 기분으로)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말았다.
지금은 그런 기록을 보관하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다. 가끔 자신의 옛날 일기장을 스캔해서 올려놓는 블로그를 보면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적어도 사료(응?)의 역할은 충실히 할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일기장에 관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충격적인(?) 기억은 1학년 때 가장 처음 썼던 일기이다. 밤에 엄마랑 놀이터에 가서 그네를 탔는데, 내가 굉장히 높이까지 올라가서 엄마는 놀랐다- 는 서너줄 정도의 짧은 일기였는데, 셀 수 없이 사라지고 왜곡된 기억 중에 지금까지 뇌 한 구석에 이 기억이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선생님이 내 일기를 보시고 일기에 제목을 붙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목(<놀이터> 였던 것 같다)을 붙였나며 굉장히 놀라셨기 때문이다. 물론 어쩌다 처음 쓴 일기에 꺽쇠까지 붙여가며썼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무려 8살 때 일 아닌가!
그런데 좋은 기억은 이것 뿐이고, 나머지는 아빠가 일기를 검사하고 마구 혼내서 안 좋은 기억 뿐이다. 5학년 때는 중창부를 '가운데 창문'이라고 썼다가 혼났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 나서 '노인은 낚시줄만 버리게 되었다.' 라고 썼다가 혼났다. 6학년 때는 미국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도이칠란트에 3:2로 진 경기를 일기에 쓰면서 '그럴 줄 알았어.' 라고 썼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혼났다.
글씨를 제대로 안 쓴다고도 혼났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 내 글씨는 지금으로 따지자면 피오피체와 개성체를 섞어놓은듯한 모습이었는데, 아빠는 궁서체로 쓰라고 버럭하고 으르렁대며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쓰게 했다. 물론 나는 궁서체 글씨를 쓰라면 쓸 수 있었는데(4학년 때는 교실 뒤 조그만 칠판에 쓰기 책에나 나올법한 궁서체 글씨로 공지사항 같은 걸 쓰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왜 선생님은 자기가 안 쓰고 날 시켰는지 모르겠다.), 그러려면 손이 굉장히 아프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간단히 말해 짜증이 났다.

어쨌거나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는 일기를 매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는데, 웃기는 건 감수성이 철철 흘러넘치는 시기에 진입하다보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일기장(얇은 공책 형태가 아니라 두꺼운 표지에 대략 정사각형 모양의 다이어리)에 공들여가며 비밀스런(!) 이야기를 끄적대더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 펼쳐보면 신경질이 나서 뼈와 살을 분리시키고 싶을 정도로 유치찬란하다. -_-;;; 이런 건 그냥 고이 간직만 하는 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ㅋ

그리고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성별을 가리지 않고 너도 나도 다이어리를 쓰는 게 유행이었다. 즉석 스티커 사진과 다이어리 꾸미기 전용 스티커가 유행하고 마치 방명록에 글 남기듯 남의 다이어리에 글을 써 주며(참나... 이게 뭐하는 짓이지? ㅋ) 갖가지 디자인의 속지, 엽서, 출처가 불분명한 책에서 따온 글, 친구들의 삐삐 번호가 적힌 전화번호부(응?)가 난무하던 때였다. 나는 지갑을 따로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갑 역할도 톡톡히 수행했다.
하지만 날마다 할 일과 한 일을 꼼꼼히 정리하던 시절은 2년 남짓이었고 특히 대학에 입학하고 홈페이지를 만들고 나서는(특히 궁시렁 게시판) 다이어리는 항상 손에 들고 다니는 두꺼운 지갑(그렇지만 모든 것이 들어있는)과 동의어가 되었다. 쓰지 않아도 관습적으로나마 달고 다니던 주간 일정(올해와 작년 아카이브를 합쳐 대략 52장 필요)은 3학년이 되면서 간편한 월간 일정(13장 필요)으로 바꿔 버렸다.

작년에 9년 동안 들고 다닌 다이어리를 영영 잃어버린 이후로는 난생 처음 지갑을 쓰고 있다. 하지만 한동안 손이 허전하던 걸 빼면 불편한 건 없다. 아카이브의 역할은 제로보드가, 이제는 포맷을 바꿔 블로그가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질 정도로 주객이 전도되어 제 기능을 하고 있으니.
서기 2080년경 "넝마 종이1의 페스트"가 수집가들의 세계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아마 아시아의 어느 머나먼 지방에서 유래한 박테리아(학명은 코메스토르 린테이 시넨시스Comestor lintei sinensisi)가 서구 세계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모든 넝마 종이를 훼손시켰다. 말하자면 구텐베르크 시절 이후부터 19세기 중엽, 즉 섬유소로 생산한 종이가 사용되기 시작할 때까지 제작된 모든 책이 대상이었다. 정말로 멋진 운명의 장난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까지는 목재로 만들어진 종이는 70년이 지나면 썩지만, 그와 달리 넝마로 만들어진 종이는 당당하게도 썩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써 오래 전부터 전 세계의 출판인들은 '중성지'로 만든 고급 책을 생산하고 있었다. 따라서 목재 종이는 아주 깨끗한 고서적들의 신선하고 바삭거리는 넝마 종이에 저항하면서, 오랜 세월에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데 2080년 경에 이르러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목재 종이는 세월에도 끄떡없게 되었을뿐 아니라, 과거에는 인쇄업자들의 영광이었던 넝마 종이는 전 세계의 도서관에서 코메스토르 시넨시스의 음울한 활동과 함께 문자 그대로 가루가 되기 시작했다.
맨 먼저 "히프네로토마키아 필리폴리"2 ii의 모든 판본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조금씩 좀이 슬기 시작했다. 이어서 종잇장들은 아주 가느다란 거미줄로 바뀌었고, 결국에는 엄청나게 값비싼 종이들이 완전히 분해되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화학자들의 노력도 소용없었고, 볼록 판형을 만들어 구원해 보려는 불쌍한 시도가 있었지만 너무 늦었다. 책들은 이미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아델피 출판사의 "필리폴리" 새 판본(현재 가격으로 1천 글로볼, 그러니까 20세기의 돈으로는 대략 1백만 달러는 호가하는)은 거의 거미줄 같은 페이지를 드러냈고, 최소한 글자의 절반 정도는 이미 상실되었다.
이어서 뉘른베르크의 연대기, 포레스티의 부록들, 타소와 아리오스토 작품의 초판본들, 1623년에 출판된 셰익스피어의 2절판 책들, "백과사전" 전집들이 희끄무레한 구름이 되어 세계의 대규모 도서관에서 이미 황량해진 열람실들에 떠다니고 있었다. 사방에 늘어선 벽들은 모든 보물을 빼앗긴 서가들의 텅 빈 커다란 눈과 함께 그 죽음의 날갯짓을 응시할 뿐이었다.
문화적 상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재난의 즉각적인 경제적 타격은 실로 엄청났다. 1929년 경제 대공황의 가장 음울했던 몇 달 동안처럼, 크라우스3 가문의 상속인들은 뉴요크 5번가의 길모퉁이에서 사과를 팔았고, 베른르 클라브레유4는 센 강변을 따라 오렌지 껍질을 쓰레기통에 주워 담고 있었으며, 런던의 가장 하층 빈민가에서는 파무어 경과 콰리치사5의 직원들이 비쩍 마른 몰골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안개, 불붙은 석탄의 불티가 바람에 흩날리는 가운데 배회하고 있었다. 한 쪽 신발은 굽이 떨어져 나갔고 낡은 긴 외투는 더러운 헝겊을 덧대어 누더기가 되었으며, 한 손으로는 병든 아이를 붙잡은 채 행인들에게 자선을 구걸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전날 밤의 스크루지 아저씨처럼 무관심하고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그런 재난에서 품위있게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은 마리오 스코냐밀리오6였다. 그는 로고메도7의 어느 빵집에서 특별히 만드는 나폴리식 파이의 소매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는 동안 수집가나 서적상 모두 충격에서 벗어나 서서히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수집가들은 본능적인 수집 욕심에 이끌렸고, 서적상들은 합리적인 '아우리 사크라 파메스'8에 이끌렸던 것이다. 고서적 시장은 근대 골동품을 중심으로 다시 정비되었다. 그러니까 "집 없는 천사"와 쥘 베른의 하드커버 판본들에서 아주 최근의 작품들까지 그 대상이 되었는데, 최근 작품들은 출간된 지 1년도 지나기 전에 벌써 골동품이 되었다(특히 인터넷과 전자책의 승리와 함께 인쇄된 책은 이제 애호가나 실리콘 알레르기가 있는 독자만을 위해 아주 제한된 부수만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탁월한 안니발레 로시의 시집, 존 스미스의 소설, 브람빌라의 경구 모음, 파우타소의 평론집, 로몰레토 피치고니 또는 살바토레 에스포시토의 전집은 벌써 수천만 달러iii를 호가하게 되었다. 20세기 90년대의 어느 잔인한 인물의 책은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3백만 달러에 팔렸는데, 일본의 어느 은행이 구입하였다.
물론 그것은 저자의 서명이 들어 있지 않은 판본들이었다. 사실 이제는 골동품 시장의 옛날 법칙을 뒤엎는 또 다른 현상으로서 '비교류 판본non-association copy'이 특히 높게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달리 과거의 작품에서는 가령 '저자 기증'이라는 자필 헌사가 붙은 키르허9 신부의 책은 진본 또는 탁월한 희귀본으로 간주되었으며, 심지어 베빌라쿠아10에게 헌정한 코르델리11의 책을 더 선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골동품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실 20세기 중엽부터 작가가 책을 한 권 출간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일련의 작업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었다. 1) 출판사 사무실에서 언론(기증 도서), 비평가와 언론 지도자들을 위해 최소한 1백 부에 서명하고,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들, 스트레가 문학상12, 비아레조 문학상13의 심사위원들, 그리고 나중에 캄파엘로 문학상14의 민간 심사위원이 될 수도 있는 베네치아 지역의 환경 운동가나 노동자들에게 나눠 줄 몇백 부에다 서명하는 작업, 2) 이탈리아 100대 도시의 수많은 서점에 앉아서 그곳에 있는 독자 대중을 위해 서명하는 작업, 그리고 3) 서점 상인들을 위한 수천 부에 서명하는 작업. 그런데 서적상들은 나중에 단골 고객들에게 그게 유일한 책이라고 장담하면서 은밀하게 가격을 올려 팔곤 했다. 간단히 말해 실질적으로 인쇄된 책 전체에 저자의 서명이 들어 있게 되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비평가나 기자, 심사위원, 친구들은 서명된 책을 받으면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거나, 또는 감옥(감옥에서는 책장을 마리화나 담배를 마는 데 사용했다)이나 병원(병원에서는 그곳에 서식하는 쥐들이 갉아먹었다)에 기증했다. 그런 사실을 고려해 보면 서명된 책의 유통 부수가 너무 많아졌고, 결국 가치가 떨어져 희귀본 책들의 시장에서 배제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점차 교류의 흔적이 없는 극소수 판본들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2091년에 이미 피암메타 소아베사15는 철저하게 서명이 없는 올리비에로 딜리베르토16의 짤막한 시 "실비아에게"17를 5천만 달러를 매겨 목록에 올려놓았다. 서명이 없는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의 또 다른 짧은 시 "실비오에게"iv는 1억에 메디올라눔18에 팔렸다. 서명이 전혀 없이 깨끗하고, 마르첼로 델루트리19의 애정어린 서문이 실린 보렐리20의 전집(베를루스코니 출판사, 유토피아 도서관)은 2억에 프렐리아스코21의 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마리오 스코냐밀리오는 나폴리식 파이 소매상을 집어치우고 자신의 책방을 다시 열었는데, 줄리오 안드레오티v의 "나의 감옥 생활"22(2001) 깨끗한 판본 하나를 2억에 팔면서 고서적 시장에 의기양양하게 복귀했다. 그 책은 바로 저자가 자신의 친구인 어느 신부(神父)에게 결혼 선물로 보낸 것인데, 일종의 액막이로 일부러 어떤 확인 표시도 하지 않은 판본이었던 것이다.

미네르바 성냥갑 La Bustina di Minerva
움베르토 에코
밀라노, 봄피아니, 2000






= 번역자 김운찬의 주석 =
  1. 서양에 처음으로 종이 제작 기술이 전파되었을 때, 그 주원료는 헌 마(麻)나 아마, 면 섬유 등을 넝마 형태로 수집해 사용하였다. 하지만 넝마는 수집으로 충당하기에는 부족하고 값도 비쌌다. 그러다가 18~19세기에 걸쳐 산업화와 함께 펄프 등 섬유소를 화학적으로 처리한 근대적인 형태의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2. Hypnerotomachia Poliphili. 콜론나Francesco Colonna의 작품으로 이탈리아어로는 '폴리필로' 또는 '폴리필로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인용된다.
  3. 현재 미국의 가장 유명한 고서적 거래상들 중 하나.
  4. 현재 파리의 유명한 고서적 판매상.
  5. 1847년 런던에서 창립된 고서적과 필사본 거래 전문 회사.
  6. 1990년 밀라노에서 창간된 골동품 및 도서 애호가들을 위한 전문 잡지의 편집인이며, 고서적 전문 서점을 소유하고 있다.
  7. 밀라노의 구역 이름.
  8. auri sacra fames.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3권 57행에 나오는 표현으로 '황금에 대한 지독한 욕심'을 의미한다.
  9. Athanasius Kircher(1601-1680). 도이칠란트의 예수회 수도사. 철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헌학적 연구, 공상 과학적 해석, 음악, 물리학, 지질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10. Alberto Bevilacqua(1934-). 이탈리아의 작가로 수많은 작품과 함께 여러 잡지와 신문에 기고하고 있다.
  11. Franco Cordelli(1943-). 이탈리아의 작가로 여러 편의 소설과 평론집, 시집을 발표하였다.
  12. 1947년 일단의 문인들이 로마에서 창립한 문학상으로 매년 현대 소설 작품 중에서 한 편을 골라 시상한다. 현대 이탈리아의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꼽힌다.
  13. 1930년부터 시상하기 시작한 이탈리아의 주요 문학상 중의 하나.
  14. 1963년 베네치아에서 시작된 문학상.
  15. 현재 로마에 있는 고서적 책방의 이름.
  16. Oliviero Diliberto(1956-). 현재 이탈리아 공산당 계열의 하원의원.
  17. A Silvia. 이 시는 원래 레오파르디의 서정시로 유명하다.
  18. 현재 밀라노에 있는 고서적 책방의 이름.
  19. Marcello Dell'Utri(1941-). 정치가로 1994년 '힘내라 이탈리아Forza Italia'당의 창당 멤버였고 1996년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1999년에는 유럽의회의원, 2001년에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 Francesco Saverio Borreli. 밀라노의 검찰청장으로 1992-1998년에는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깨끗한 손Mani Pulite'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21. 현재 토리노에 있는 고서적 책방의 이름.
  22. Le mie prigioni. 원래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던 펠리코Silvio Pellico(1789-1854)의 옥중기. 그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읽힌 감동적인 작품으로 1832년에 출간되었다.


= 궁시렁의 추가 주석 =
  1. 아시아라고 하면 1순위로 갖다붙이는 것이 중국인 것은 에코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ㅅ-;;;
  2. 움베르토 에코의 최신 소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의 주인공인 얌보의 박사 논문이 이 작품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3. 그러니까 미래의 화폐 단위로 따지면 수만 글로볼이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이 뒤로도 글로볼은 나오지 않는다.
  4.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는 밀라노 검찰청장 시절 깨끗한 손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후 장관직을 거쳐 정치가로 변신, 현재 유럽의회의원이며 부패 척결을 모토로 하는 이탈리아 가치당(Italia dei Valori)을 이끌고 있다. 실비오란 물론 이탈리아의 최고 부자이자 AC밀란 구단주면서 깨끗한 손 운동을 피해 힘내라 이탈리아당을 창당한 뒤 온갖 정경유착 의혹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국무총리를 지내고 있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말한다.
  5. 총리를 7차례, 장관을 36차례나 역임했으나 깨끗한 손 운동 이후 열린 1994년 총선에서 패배한 뒤 2억5천만리라(1억3천만원)의 불법 정치 자금 조성혐의로 법정에서 심판을 받았다.


+ 이럴수가!!! 이 쾌활하고 명랑한 글이 움베르토 에코가 쓴 게 아니라 더글러스 애덤스의 컴퓨터에 꼭꼭 숨겨져 있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발표된 거라고 해도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믿을 것이다. ㅋㅋㅋ

괴벨스의 입

And Everything 2008. 8. 11. 02:48


움베르토 에코의 최신작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에는 (패색이 짙은) 아프리카에서 전투 중인 이탈리아군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 기사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라디오 런던(BBC Int'l)으로 영국인이 전하는 전황을 몰래 듣는 모습이 나온다. 이탈리아의 신문은 최대한 유리한 쪽으로만 기사를 쓰는 대신 적어도 뻥은 치지 않았지만,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려 애쓰는 주인공은 그 옛날의 신문을 다시 읽으면서 당시에는 차마 전할 수 없었던 행간에 숨어있는 진실을 짚어낸다.

말하자면, 이 사진을 보고,


아, 그래서 츠키야마가 들고 있던 태극기가 안 보이게 사진을 찍었구나- 라는 걸 알아채는 식이랄까?


물론 나쁜 소식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명바기가 거꾸로 된 태극기를 들고 있는 사진은 네티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수없이 펌질에 펌질을 거듭한 뒤에야 기사가 삭제되거나 다른 사진으로 대체된 뒤 몇몇 언론에 짤막하게 보도되었다.

어째서 19세기의 세계는 시장에서의 교환으로 경제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사회가 온 것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계제시대의 도래이다. 인간과 자연은 공장이 항상 이상적 가격에 이상적 수량을 생산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5분 대기조로 봉사하는 투입물이 되어야 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쏘아붙인 대로, 이제 그 공장은 인간과 자연을 갈아 마셔버리는 악마의 맷돌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자연을 어느 때이건 또 얼마만큼이건 그 악마의 맷돌이 맘껏 포식할 수 있도록 쉽게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화폐만 내면 마음껏 구입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서 노동시장과 원자재 및 곡물 시장을 만들어버리면 된다. 그런데 원래 인간과 자연은 상품이 될 수가 없다. 상품이란 판매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다. 조물주가 언제 판매를 목적으로 토지와 공기를 만들었으며, 인간이 언제 판매를 목적으로 새끼를 낳기 시작했는가. 이것들을 상품인 것처럼 거래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노동', 자연에 '토지 및 원자재'라는 가면을 씌우고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우겨야 한다. 이 노동, 토지, 그리고 화폐조차 상품에 불과하다는 '상품 허구'에 기초하여 성립한 가면극이 바로 19세기에 나타난 시장 자본주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허구는 어디까지나 허구다. 인간은 인간이며, 자연은 자연일 뿐이다. 이것을 상품이라고 우겨서 마음껏 사고 팔 수 있게 되면, 인간도 자연도 끔찍한 고통 앞에 발가벗겨 던져지게 된다. 예컨대 누구나 떠들어대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고용주가 상품에 불과한 노동력을 맘껏 사고 팔 수 있는, 즉 필요에 따라 맘껏 고용했다가 맘껏 해고할 수 있는 자유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을 위시한 경제학과 교수들은 어째서 종신고용제(tenure)라는 철밥통을 차고 살았던 것일까. 만약 대학의 종신고용제를 없애겠다고 하면 그들은 순순히 받아들일까? 혹시 머리띠 두르고 '노가다'들 마냥 파업 농성을 벌이게 되지 않을까?

국제통화기금 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시장 자본주의의 논리를 앞세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최전선으로 밀려 나오게 되었다.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에서 인간과 자연, 대학교와 정당과 예술과 산과 강과 들판 모두의 이름과 성격을 결정지은 주체는 현금 수익의 흐름의 논리를 앞세운 대기업과 외국 투자자였다. 삼성이 원하는 이상적 대학의 모습은 전국의 대학 교육에 하나의 헌장을 제시한 셈이고, 심지어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며 비분강개하던 어느 대학교 인문대 교수들이 앞장서서 추구하는 충성의 대상이 되었고, 이상적인 대통령은 어느새 CEO 대통령이라는 담론이 횡행하고 있고, 나라 전체의 살림살이는 대기업이 투자하고 싶은 조건 창출이라는 것이 마치 과학적 법칙처럼 되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가면무도회에는 엄혹한 네메시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폴라니의 책 "거대한 변형"이 함축하는 바이다. 시장이든 대기업이든 인간과 자연에게 자신에게 유리한 이름과 성격을 어거지로 마구 뒤집어씌운다면 인간도 자연도 처음에는 그 가소성과 인내심의 극한까지 내몰리게 되겠지만, 일정한 선을 넘게 되면 아무도 그 결과를 예측하고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사회 전체가 실업, 가계 부채, 부동산 위기,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로 시달리는 상황에서 '일등 기업'이니 '글로벌 경영'이니 하는 꿈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 가능'할까. 혹시 또 다른 '거대한 변형'이 21세기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홍기빈 (사단법인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고전의 향연
이진경, 이정우, 박혜영, 안광복 외 지음
한겨례 출판사, 2007

단짝 친구

And Everything 2008. 7. 17. 16:43
나는 잠깐 얕은 잠을 잔 모양이다. 내 귀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다. 찾아온 사람은 잔니 라이벨리였다. 글동무인 그와 나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같은 단짝이었다. 그는 마치 형제처럼 나를 끌어안으며 감격스러워 했고,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벌써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네 삶에 대해서는 내가 너보다 잘 아니까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 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고맙지만 파올라가 이미 우리 얘기를 해 줬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동기동창이었다. 그 다음에 나는 토리노 대학에 진학했고, 그는 밀라노에 가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한 번도 멀어졌던 적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고서적을 팔고 있고, 그는 사람들이 세금을 내거나 내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저마다 자기 길을 갈 수도 있었을 법 하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한 가족처럼 지낸다. 그의 두 손자는 내 손자들과 놀고, 우리는 크리스마스와 설날을 언제나 함께 보낸다.

움베르토 에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p. 71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La Misteriosa Fiamma della Regina Loana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2008
After a long, heart-stopping moment of internal crashes and grumbles of rending machinery, there marched from it, down the ramp, an immense silver robot, a hundred feet tall.
It held up a hand.
"I come in peace," it said, adding after a long moment of further grinding, "take me to your Lizard."
Ford Prefect, of course, had an explanation for this.
"It comes from a very ancient democracy, you see..."
"You mean, it comes from a world of lizards?"
"No, nothing so simple. Nothing anything like to straightforward. On its world, the people are people. The leaders are lizards. The people hate the lizards and the lizards rule the people."
"Odd," said Arthur, "I thought you said it was a democracy."
"I did," said Ford. "It is."
"So," said Arthur, hoping he wasn't sounding ridiculously obtuse, "why don't the people get rid of the lizards?"
"It honestly doesn't occur to them," said Ford. "They've all got the vote, so they all pretty much assume that the government they've voted in more or less approximates to the government they want."
"You mean they actually vote for the lizards?"
"Oh yes," said Ford with a shrug, "of course."
"But," said Arthur, going for the big one again, "why?"
"Because if they didn't vote for a lizard, the wrong lizard might get in," said Ford. "Some people say that the lizards are the best thing that ever happened to them. They're completely wrong of course, completely and utterly wrong, but someone's got to say it."
"But that's terrible," said Arthur.

Douglas Adams, So Long, and Thanks for All the Fish, Ch. 36

심장이 멈출 것만 같은 기나긴 시간 동안, 우주선 속에서 기계들이 다 찢어발겨지는 듯 쿵쾅거리고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안에서 키가 30 미터쯤 되는 거대한 은색 로봇이 램프를 타고 씩씩하게 걸어 나왔다.
로봇은 한 손을 들었다.
"나는 평화의 사절로 왔다." 로봇은 금속이 갈리는 소리를 한참 더 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의 도마뱀에게 데려다 다오."
물론, 포드 프리펙트는 이 사실을 해명해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 우주선은 까마득한 고대의 민주주의 세계에서 온 거야."
"그럼, 저 우주선이 도마뱀의 세계에서 왔다는 거야?"
"아니, 그렇게 간단할 리 없지. 전혀 그렇게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니야. 저 세계에서, 사람들은 사람이야. 지도자는 도마뱀이고. 사람들은 도마뱀을 끔찍하게 싫어하고, 도마뱀은 사람을 지배해."
"이상하네. 네가 민주주의라고 한 거 같은데."
"그랬어. 민주주의야."
"그런데." 아서는, 자신이 말도 못하게 멍청한 인간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물었다. "왜 사람들은 도마뱀을 쫓아내버리지 않아?"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거야. 전부 투표권을 갖고 있거든. 그래서 말하자면 자기네들이 투표해서 뽑은 정부니까 자기네들이 원하는 정부에 가까울 거라고 대충 생각하고 사는 거지."
"그러니까 투표를 해서 도마뱀을 뽑았단 말이야?"
"오, 그럼." 포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당연하지."
"하지만." 아서는, 다시 큰 걸 하나 터뜨리기로 작정했다. "왜?"
"도마뱀한테 표를 던지지 않으면, 잘못된 도마뱀이 정권을 잡을까 봐 그렇지." 포드는 어깨를 다시 으쓱했다. "어떤 사람들은 도마뱀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해. 물론 머리부터 발 끝까지 완전히 철저하게 틀려먹은 얘기야.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해야지."
"하지만 그건 너무 끔찍하잖아." 아서가 말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4: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
주위의 독촉과 압력을 받고서야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무궁무진한 입담을 풀어내던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제발 무지무지하게 재미있는 책을 번역하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응답을 받은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김선형과 SF 마니아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이 장르에 적잖이 애정을 가진 권진아 옮김
책세상, 2005

우베르티노는 이렇나 동일함과 차이를 깊이 통찰하지 않고 성급하게 윌리엄을 '이성을 우상화하는 자'로 간주한다. 그 역시 성급하게 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과 태도가 다른 이를 이단으로 몰아붙여 배제하는 편협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순수한 태도를 가졌다 해도, 그 태도 자체가 다른 것을 완벽하게 배제할 때에만 유지 가능하다면, 그것은 곧 독단이요, 이 독단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해로운 독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강유원, "장미의 이름 읽기" p. 65

장미의 이름 읽기 - 텍스트 해석의 한계를 에코에게 묻다
강유원 지음
미토, 2004

어느 날 한 관광객이 목가적인 풍경을 찍으러 해변에 갔다가 어부가 고깃배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어부에게 날씨는 좋고 바다에 고기도 많은데 왜 이렇게 누워서 빈둥거리느냐고 물었다.
"고기는 필요한 만큼 잡았거든."
"하루에 서너 차례 더 출항하면 고기를 서너배는 더 많이 잡을 수 있고, 그러면 1년쯤 뒤에는 배를 한 척 살 수 있을 텐데요. 한 3년이 지나면 작은 배 한두 척을 더 사게 될 테고, 그러면 결국에는 여러 척의 어선을 지휘하며 물고기 떼를 추적할 헬리콥터를 장만하게 되거나, 잡은 고기를 대도시까지 싣고 갈 트럭을 여러 대 살 수 있을 거에요."
"그러고 나면?"
"그러고 나면, 멋진 해변에 편안히 앉아 아름다운 바다를 조용히 바라보며 쉬는 거죠!"

"그게 바로 당신이 여기 오기 전까지 내가 하고 있던 거잖수!"

사람들이 시공간적 풍요로움과 평화를 얻고자 끊임없이 재화를 더 많이 획득하는 거라면, 결국 부자들은 가난한 농부와 어부들이 자연 속에서 누렸던 그 소박한 상태를 얻으려고 평생 고생하는 셈이 된다. 하지만 헨리 D. 소로의 "월든"을 읽어 보면 가난한 어부가 자연에서 즐기는 오후의 따사로운 평화란 관광객의 맹신과는 달리 실제로는 작은 경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잘 살고 싶다'는 경제적 욕망은 자연의 파괴뿐 아니라 다른 약자들을 침략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한번은 소로가 월든 호수에서 낚시를 하다가 비를 만나게 되었다. 다급해진 소로는 가까이 있던 작은 오두막으로 몸을 피했는데, 그곳에는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가난한 농부 가족이 살고 있었다. 농부는 비록 몸은 중노동으로 힘들어도 미국에서는 차와 커피와 고기를 매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민 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로는 바로 그와 같은 삶의 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결국 미국이 멕시코를 침략하고, 인디언을 학살하고, 흑인을 노예로 부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다운 미국은 그런 것들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생활양식을 자유로이 추구할 수 있는 나라여야 하며, 또 노예제도나 전쟁을 국민이 지지하도록 국가가 강요하고, 그런 물건들을 사용하는 데서 직접, 간접으로 초래되는 쓸데없는 비용을 국민이 부담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없는 나라여야 한다.

박혜영 인하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고전의 향연
이진경, 이정우, 박혜영, 안광복 외 지음
한겨례 출판사, 2007
1 2 3 4 5 6